시대가 많이 변했습니다. 수행도 전법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이 요구됩니다.
저는 부처와 중생을 둘로 보지 않기에 부처가 중생을 가르친다거나 중생이 부처를 따른다거나 이런 형식을
벗어나, 무엇이든 진심으로 함께하는 마음이 부처와 중생을 둘로 보지 않는 깨달음의 길, 깨달음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까닭에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 부처의 깨달음이 나의 삶 속에 살아 있게 하여 그것을 또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면서 우리네 삶과 인생을 깨달아 갈 수 있다면 하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그림 속에 부처의 깨달음과 나의 깨달음, 뿐만 아니라 일체만물의 깨달음을 말과 글이 아닌 직관으로 느낌으로
표현하고 전하고 싶은 마음에서입니다. 제게 맞는 수행법으로 그림을 그리고 삽니다.
어릴 적부터 존재에 대한 의문이 많았습니다.
삶은 무엇인가 죽음은 무엇인가 또는 진리란 인생이란 이런 근원적인 것에 대한 의문 말입니다.
그래서 학교 공부에는 별관심이 없었고 이런 의문들을 풀기 위해서 여러 가지 책들을 많이 읽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의문을 풀지 않고선 내가 하루를 살든 천년을 살든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 같아서.
그러던 어느 날 고령에 있는 작은 서점 한구석에 외로운 방랑자처럼 꽂혀 있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라는 책을 보는 순간 그 글이 내 가슴을 꽝 쳤습니다. 도무지 그게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채 왜 그리 가슴이 두근
거렸는지, 외로운 방랑자처럼 느껴졌는지……. 아무튼 그때 니체라는 사람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 사람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고 자기선언을 확실하게 한 그 매력에 빠졌던 것 같아요.
뭔지는 모르지만 작가의 단호하고 분명한 입장이 서럽게 사무친 듯한 그런, 뭔가 처절하면서도 통쾌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집에 와서 책을 읽어보니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나 폭포처럼 쏟아져 내려가는 니체의 언어에 홍역을 치르는
아이처럼 가슴앓이를 했습니다. 그 책에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그대 벗들이여 참으로 그대가 나를 배반한다면 나는 비로소 그대의 벗이 되겠노라.”
아직도 이 문구를 생각하면 그때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당시에는 이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몰랐으나 내 가슴 한구석에 진언처럼 화두처럼 아주 깊게 박혀버렸습니다.
그 후 그 뜻을 알려고 무진 애를 써봤지만 그땐 그 뜻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출가해서 그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대충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니체의 자기선언이었습니다.
모든 깨달은 자는 깨달음과 동시 제일 먼저 자기선언을 합니다. 나는 이렇게 깨달았노라고.
부처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했고, 예수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했듯이.
니체는 “그대 벗들이여 그대가 참으로 나를 넘어서 그대 스스로 자유인이 된다면 난 비로서 그대 벗이 되겠노라.”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뜻으로 말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으니 참 답답했지요.
그러다 우연히 붓다의 일대기를 기록해놓은 『불교성전』이란 책을 만났는데, 그 책을 읽어보니 싯다르타라는 사람
이 너무 멋진 거예요. 제가 그동안 보아왔던 모든 사람들은 뭔가를 이루고 가지려고 했던 반면 이 사람은 일체를
버리고 오직 한 가지(생사일대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홀연히 떠나는 겁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 거기서 ‘그래 이것이야 말로 진정 장부가 한번 해볼 만한 일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바로 해인사로 출가를
했지요. 니체가 나를 유혹한 사람이라면 부처는 나를 빠뜨린 사람이죠.
만약 내 인생에 이 두 사람이 없었더라면 지금 난 어찌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정신이 번쩍 듭니다.
그때 쓴 출가 시입니다.
길은 많으나 갈 길은 없고
사람은 많으나 진인은 없더라
세상은 이미 동면에 잠잠한데
공연히 나 홀로
세상 가운데 섰구나
그땐 그랬습니다. 길은 많으나 정녕 내가 가야 할 길이 보이지 않았고 사람은 많으나 정녕 내가 따를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세상이 온통 겨울잠에 빠져 있는 것 같았고, 괜히 나 혼자 쓸데없이 세상 가운데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논다는 말은 제가 가장 많이 쓰는 말인데요, 저는 이 세상이 내 앞에 펼쳐져 있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마음껏 뛰고 놀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하는 논다는 말은 집중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어린아이가 놀 땐
아주 사소한 것에도 온 몸으로 집중해서 놉니다. 논다는 것은 존재 그 자체를 논다는 말입니다.
무엇이든 마음이 분열되지 않고 매순간 순간을 전체적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가령 예를 들면 참선을 하면 참선을 놀고(집중) 염불을 하면 염불을 놀고(집중)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 집중해서
산다는 것입니다. 부처가 오면 부처를 놀고 중생이 오면 중생을 놀고 선이 오면 선을 놀고 악이 오면 악을 놀고
삶이 오면 삶을 놀고 죽음이 오면 죽음을 논다. 이렇게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놀아버리면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삶도 죽음도 노는 것인데. 하지만 이렇게 놀 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니 제가 만날 놀아라, 놀아라, 하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닙니다(웃음).
제가 이번 책 제목을 『바람에게 길을 물으니 네 멋대로 가라한다』 이렇게 정한 것도 네 멋대로 한번 놀아봐라, 네가
우주의 중심이 되어 주인공이 되어 보다 자유롭고 통쾌하게 네 멋대로 한번 살아봐라, 이런 뜻입니다. 힘든 현실에
맞닥뜨리면 여유로운 마음을 내기가 어렵다고 하셨는데, 그렇습니다. 세상에 힘들지 않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이치를 모르기 때문이지요. 방금 내가 한 말 논다는 의미를 제대로 알면 고통도 놀아버리는 지혜가 생
깁니다. 우리는 고통이 오면 무조건 그 고통을 피하려고만 하는데 지금 여기가 고통스러워 저리로 가보면 거기 그만
한 고통이 또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고통 자체를 이해해야지요. 마치 파도를 탈 줄 아는 사람
이 파도를 갖고 놀듯이 고통의 파도가 밀려오면 고통의 파도를 탈 줄 아는.